국가 전력수급 정책이 중요한 변곡점을 맞았다. 올해 수립해야 하는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두고 발전설비 로드맵을 어떻게 짜야 할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동안 전력수급계획은 앞으로의 전력소비 예상치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발전 설비를 늘리는 것에 중점을 둬 왔다. 그러나 지난해 신기후체제가 조기 발효되면서 더 이상 늘어나는 수요만큼 전력 공급량을 늘릴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국가 에너지 믹스에서부터 적정 예비율 등 모든 것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생각할 때다.

이번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목표 연도는 2031년이다. 정부는 2031년까지 국가 전력 소비증가량을 예측하고 이를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까지 전력수급계획의 기본 틀은 경제성장률에 근거해 해당 연도 전력 수요 예측을 하고 이를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발전소 건설 계획을 짜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최근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원전과 석탄화력 증설 반대 및 밀양 송전탑 문제 등 발전소 건설로 전력 수요를 대응하는 공급 확대 정책은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정부는 공급 확대가 아닌 수요 조절로 전력 정책의 무게 중심을 조금씩 옮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7차 전력수급계획에서는 이를 위해 예비 설비로 있던 석탄화력 2개 프로젝트를 취소하는 등 다소나마 관련 의지를 표출하기도 했다.

8차 전력수급계획에서도 신규 발전설비 억제 기조는 계속될 전망이다. 8차 계획 목표 연도보다 한 해 앞선 2030년 우리나라는 국가 온실가스를 배출전망치(BAU) 대비 37% 줄이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7차 계획에서는 선언성 의미였다면 8차 계획에서는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 의지를 실제로 담아야 하는 상황이다.

전력수급계획 수립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국가 전력 수요 증가 추이다. 전력 수요가 적정 수준을 유지하거나 줄어든다면 신기후체제 대응이 쉽지만 반대로 늘어나면 선택권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전력사용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 2000년 이후 최대 전력사용량은 매년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2000년 4101만㎾를 기록한 최대 전력사용량은 2016년 기준 8518만㎾로 두 배 이상 뛰었다. 매년 최대 전력이 평균 270만㎾ 늘어난 셈이다. 이런 추세라면 2031년 국가 최대 전력사용량은 지금보다 4000만㎾가 더 많은 1억2500만㎾ 발전 설비가 필요한 수준에 다다르게 된다. 최신 원전 APR 1400 모델로 계산해도 약 30개의 발전소가 필요한 셈이다.

국가 전력 수급 대응에서 기준은 평균 전력사용량이 아닌 최대 전력사용량을 활용한다. 한 해 평균 전력 소비가 낮다 해도 발전 설비는 최대 전력 소비 기준보다 높게 확보해야 한다. 만일 평균 전력소비량에 맞춰 수급 체계를 짠다면 최대 전력사용일은 대규모 정전이나 전력 계통이 붕괴되는 블랙아웃을 감수해야 한다.

정부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적정 예비율 유지에 힘쓰고 있다. 전력 소비량을 100으로 봤을 때 발전 설비는 110~120 정도로 높게 가져가 수급 안정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적정 예비율은 2011년 이후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설비 투자 최소화의 경제성 우선보다는 어느 정도 여유 설비를 확보, 수급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다. 순환 정전을 기점으로 전력 업계의 과거 적정 예비율에 대한 묵시의 합의는 15% 수준이었지만 2015년 7차 수급계획에서 적정 예비율은 23%까지 올라갔다.

적정 예비율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지난 7차 계획은 물론 이번 8차 계획에 대해서도 정치권과 사회단체에서는 정부가 과도한 예비율 전망치를 가져가려 한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평시에는 국가 전력 예비율이 25% 수준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비율 25%의 많고 적음을 떠나 문제는 최대 전력 때의 예비율은 여전히 10% 미만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여름 최대 전력은 8518만㎾를 기록, 예비율은 9% 수준에 머물렀다. 그동안 수요 예측이 과도했다는 지적이 무색할 정도로 폭염으로 인한 전기 소비 증가는 예비율을 쉽게 끌어내렸다. 순환 정전이 있던 2011년 전후 전국 차원의 절전 운동이 있었을 당시 예비율이 5~6%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의 예비율이 그리 많다고 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8차 수급계획과 관련해 구상하고 있는 적정 예비율은 비공식으로 25% 수준이다. 약 15%를 평시 예비율로 가져가고 10%를 비상 예비율로 대응한다는 구상이다. 발전소가 많다는 지적은 있지만 최대 전력을 기준으로 하면 현 시점에서도 추가 발전소 건설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관련 배경에는 원전·석탄 등 국가 전력 바닥을 책임지는 기저 발전 비중 감소가 작용하고 있다. 이에 앞서 7차 계획에선 예비 설비로 계획되던 석탄화력 2개 프로젝트가 취소됐고, 지난해 7월에는 아예 국가 차원에서 탈 석탄 정책이 발표됐다. 당장 2031년 이내에 10개 석탄화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원전도 마찬가지로 국내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는 올해 영구 정지한다. 이후 2031년까지 현 원전의 약 절반이 설계수명 만료 시점이 온다. 반면에 최근 사회 분위기로는 이들 원전 연장 운전을 담보할 수 없고, 이를 대체할 신규 원전 건설도 지지부진하다. 신재생에너지로 이를 메우기에는 불안한 측면이 있다. 원전과 석탄은 한 번 가동하면 24시간 내내 같은 양의 전력을 생산하지만 신재생에너지는 날씨, 시간, 계절에 따라 전력 생산량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원전과 석탄을 줄이고 신재생 비중을 늘린다면 국가 적정 예비율은 지금보다 더 높아져야 하는 셈이다.

전력 업계 관계자는 7일 "신기후체제에 따라 신재생 비중을 높이면 전력 예비율은 지금보다 더 여유가 있어야 된다"면서 "이 경우 유휴 설비 대책에서부터 시장 구조와 요금 체계 개편 등 정책 결정을 넘어 국민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정적인 예비율 위해선 시장구조도 수술해야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을 앞두고 전력시장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따른다. 과거 수급계획은 전원믹스, 예비율, 설비용량 등 공급 요소와 시장제도를 분리한 채로 수립했다. 이로 인해 석탄, 원자력 등 발전 원가가 낮은 발전원 공급 위주 계획이 수립되면서 다양한 부작용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최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업계가 겪고 있는 극심한 경영난이 대표 사례다. 2011년 9·15 순환 정전 뒤 5차 전력수급계획 변경에서 추가된 발전소에 6차 수급계획 반영 분까지 몰리면서 예비율은 25% 수준까지 올라섰다. 발전 원가가 낮은 석탄, 원자력 비중이 압도하며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가장 낮은 원가 발전소부터 급전하는 연료변동비 반영시장(CBP) 체제를 변화 없이 계속 유지하면서 고원가 액화천연가스(LNG)발전소 가동률은 바닥까지 떨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이미 LNG발전 비중이 높은 민간 발전사 대다수가 경영난에 허덕이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1·2·3위 민간 발전사인 포스코에너지, SK E&S, GS EPS가 수년째 실적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35개 집단에너지사업자 가운데 22곳이 적자를 냈다. 열과 전기를 동시에 생산하는 열병합발전 분야에선 28개 사업자 가운데 18개 기업이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액화천연가스(LNG)를 주 연료로 전력을 생산하는 민간 기업은 모두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CBP 체제는 지난 2001년 전력 산업 구조 개편 당시 특정 사업자의 지배력을 완화하고 연료비 경쟁을 통한 효율성은 높인다는 취지로 도입했다. 당초 단기 운영을 목표로 도입했지만 15년 이상 유지됐고, 그 사이 민간 발전사가 시장에 대거 진입하면서 부작용이 일기 시작했다. 발전설비 도입에선 발전원별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면서도 정산 시장에서는 오직 원가만 고려, 비용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감축 측면에서도 CBP 체제 개선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2030년까지 발전 부문에서 약 1억톤의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 이 가운데 절반에 이르는 5000만톤을 석탄화력을 LNG로 전환해 줄인다는 복안이지만 CBP 체제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따른다.

전문가들은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시장제도 개선 방안을 함께 담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후변화 대응 및 안정성 등 외부 요인을 반영한 공급 계획과 시장제도를 설계하고, 특정 발전원이 시장에서 소외받는 부작용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김창섭 가천대 교수는 7일 "제8차 수급계획은 설비용량, 예비율 등 공급 요소와 시장제도라는 큰 인자를 연립해서 풀어야 하는 방정식과 같다"면서 "전원믹스(Mix), 발전원별 비중 등을 설정할 때 시장제도와 연계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기고/노동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본부장 dsroh@keei.re.kr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수립되고 있다. 전력수급계획의 핵심은 원전 비중 결정이다. 원전은 단위기 용량이 크고 건설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안전성을 포함한 각종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8차 전력수급계획에서 원전이 직면한 상황은 거의 최악이다. 전력 수요 증가 부진, 전력시스템 경직 및 전원 용량 간헐 증가, 지진과 안전성 불신에 의한 원전 수용성 악화 등이 현재 직면한 모습이다. 이른바 '원전 절벽'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5년 동안 전력 판매량은 연평균 1.8% 증가했다. 예상 증가율 4%의 절반이다. 과다 수요 예측 비난, 과잉 설비 우려, 신규 설비 불필요 등과 같은 주장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팩트의 단면만 본 것이다. 같은 기간 최대 전력은 예상을 넘는 연평균 3.1% 증가했다. 이 결과는 판매량 과다 예측, 최대 전력 과소 예측으로 요약된다. 최대 전력 증가 원인으로 수요 관리 부재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근본 원인은 전력 소비 구조 변화에 있다. 최근 부하율이 높은 산업용 소비가 극도로 부진하다. 우리 부하율은 아직 70% 중반이지만 산업용 소비 비중이 낮은 미국, 일본은 60%대 초반이다. 경기 침체는 산업용 전력 소비 부진을 의미하며, 이는 부하율 하락으로 직결된다. 부하율이 낮아지면 동일한 전력이 소비되더라도 발전 설비는 더 필요하다.

전력은 수요와 공급을 실시간 일치시키지 못하면 품질 저하나 정전을 초래할 수 있다. 저장 시스템 부재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저, 중간, 최대 부하용 전원이 골고루 필요하다. 발전 비용이 높아도 부하 응동력이 높은 가스발전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는 에너지 신산업 육성,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신재생에너지 보급을 촉진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는 경직성 전원이면서 간헐성 전원이다.

전력시스템 운영자는 햇빛과 바람을 조절하지 못한다. 원전도 출력 조절이 쉽지 않은 경직성 전원이다. 경직성 전원 용량이 수요를 초과하는 시간대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신재생 발전이 중단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재생 에너지가 많은 국가는 이 문제가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전력망이 연계된 국가에서 재생 에너지 발전량이 수요를 초과할 때 돈을 주고 전력을 수출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우리는 전력망도 고립돼 있다. 대책은 백업 용량, 부하 응동성이 높은 전원 확대다. 이는 필요 예비율 상승을 가져올 것이다.

안전성 향상에 대한 노력은 수용성 제고에 필수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안전설비 투자 확대와 안전성 강화, 지진 발생에 따른 '지진방재 종합대책' 발표 이후에도 지역 수용성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원전사업자의 안전에 대한 각성과 대비, 이의 홍보에도 시민들은 여전히 불안해 한다.

이들 세 가지 사례로 보면 원전에 우호, 비우호 상황이 혼재한다. 부하율 하락은 필요 설비 용량을 증대시키지만 기저 전원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 신재생 전원과 원전 증가는 전력 시스템 운영의 유연성을 저해하지만 우리 원전의 용량 비중은 아직 높지 않다.

원전 절벽을 타개하는 방법이 있을까. 원전 수용성을 결정하는 핵심은 안전성과 경제성이다. 지금의 원전 발전 비용 증가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원전에 대한 국민 인식을 환기시키기 위한 몇 가지 조치가 필요하다.

원전 경제성이 확고하다는 증거로 가능한 수준의 발전 비용 공개, 안전성 향상과 원가 절감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 비중 증대, 우리 원전의 안전성과 경제성에 대한 국제 공인 및 시민 수용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는 원전 수출 등이다. 우리에게 원전 에너지 안보나 기후변화 대응, 경제성 등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조정형 기자 jenie@green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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